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나를 언제나 설레이게 한다. 어제 새벽도 마찬가지였다. 새벽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내 귓가에, 창문에 후두둑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던 빗줄기는 정말이지 반가웠다.

생각지도 못했던 손님을 맞이한 나는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피를 준비했다. 잠에 들 수가 없다면 그냥 이대로 새벽을 지새워버리자, 당시에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.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.

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우리는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.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늦은 새벽에 단둘이서 창가 앞에 앉아 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것만도 오랜만의 일이었으니,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. 그런데 순간, 그녀가 살짝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. 분명 무어라고 말을 할 것만 같았는데 이내 곧 입을 다무는 모습이 왠지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.

그때 그녀가 갑자기,

"우리 바깥에 나갈까?"

라며 닫았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. 바깥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.

결국, 우리는 자동차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와 늦은 새벽 한적한 서울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. 차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와 라디오에서 흐르는 잔잔한 음악은 본래부터 하나였던 듯 내 귀에 감겨왔고, 내 옆에 앉아있는 그녀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아름다웠다. '행복'을 '순간'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이리라,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.

대략 한 시간 정도의 길었던 데이트를 마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다다르니 어느덧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. 지금 이대로 침대에 눕는다면 그야말로 꿀맛과도 같은 잠을 청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. 이런 생각들을 갈무리하며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키를 뽑으려 팔을 뻗었는데, 그 순간 문득 그녀의 체취가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. 무슨 비누를 쓰느냐고, 무슨 향수를 쓰느냐고 물어도 웃기만 할 뿐 결코 가르쳐주지 않던 바로 그 향기였다.

남자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용감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과 같은 때이리라, 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키스를 청했다. 사귄 지 벌써 2년이 넘었고 지난해 12월에는 서로 약혼까지 한 사이건만 키스 같은 스킨십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. 사랑이라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 것처럼 스킨십 역시 하고플 때 무작정 해버리는 그런 익숙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.

다행히 그녀는 이런 나를 거절하지 않았고, 그렇게 얼마 동안 우리 두 사람뿐인 자동차 안에는 이상야릇한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. 똑똑, 노크 소리와 함께 아파트 경비원의 한마디가 날아들기 전까지는 말이다.

"여기서 그거 하시면 안 됩니다."

늦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정복까지 갖추고 순찰에 나선 아파트 경비원은 이러한 상황에 꽤나 익숙한 듯, 노크와 함께 맡은 바 임무(?)에 충실한 한마디만을 남겨놓고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어느새 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. 그리고 조수석에서 다소 방어적인 자세(?)를 취하고 있던 그녀는, 이윽고 새침한 표정이 되어 "아저씨 그런 거 아니에요. 저희는 그저 순수하게 키스만 했을 뿐이랍니다."라고 중얼거려 나를 웃게 만들었다.

집으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. 그녀의 허리에 얹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내 쪽으로 끌어당겼더니 잠시 버티던 그녀의 몸은 이내 곧 나의 품 속으로 안겨 들어왔다.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자신의 목적지인 12층에 다다르기 전 어느 층에선가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했고, 늦은 새벽임에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경비원은 이런 엘리베이터의 타의적인 근무태만을 아주 다행히도 목격하지 못한 듯했다.

잠시 멈췄던 엘리베이터가 이내 곧 다시 움직이며 익숙한 기계음을 냈고, 그녀는 마치 내 품에서 잠든 것처럼 색색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. 아파트 경비원에 이어, 이번에는 나의 상상력이 현실을 앞서나가려 하는 순간이었다.

Comments

  1. BlogIcon rince 2008/06/29 18:07

    상상력을 현실에 맞추셨을지...
    현실을 상상력에 맞추셨을지... ^^

    perm. |  mod/del. |  reply.
    • BlogIcon rainydoll 2008/06/29 23:06

      두 개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도록 나름대로 노력을 해봤습니다만,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. ^^;

  2. BlogIcon Daisy 2008/06/30 15:14

    뭡니까 이거이거... 내 숨이 다 가빠지네;; @ㅡㅡ@
    (주책맞은 아줌마)

    perm. |  mod/del. |  reply.
  3. BlogIcon SuJae 2008/07/01 07:11

    음...

    불끈!

    perm. |  mod/del. |  reply.
  4. BlogIcon comodo 2008/07/01 14:26

    초반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읽어 내려갈수록 점점점점점...

    perm. |  mod/del. |  reply.

What's on your mind?

댓글 입력 폼